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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나토노트 / 베르나르 베르베르
    읽다 2019. 4. 2. 09:56

    타노토노트1

    정신의 자유로움을 얻는 비결은 책을 많이 읽는거야.

    우리 조상들은 죽음을 <모든 것>의 상태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의 상태로 옮겨가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 즈음에 나는 아주 간단하게 죽음은 삶의 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선을 품은 점 같은 것. 

    행복을 과시하는 사람 앞에 앉아 있는 것보다 더 비위 상하는 일은 없다.

    삶은 잠을 통해서 우리를 죽음에 길들이고, 꿈을 통해서 또 다른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끊임없는 고뇌와 영원한 고독에 묻혀 사는 나 같은 사람에게 여자들이 다가올 리 없었다.

    초월적인 본질을 점점 깊이 깨닫게 된다. 그러한 고양은 영적인 삶의 사다리를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감으로써 이루어진다. 우리는 동물적인 영혼으로부터 참 생명의 세계로 나아간다. 그 참 생명의 세계는 우리 모두가 내부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타나토노트2

    인간이 점점 더 성스러워지거나 점점 더 영리해지거나 점점 더 행복해진다고 해서 그걸 진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진보의 요체는 깨달음이 점점 더 깊어지는 데에 있다.

    내가 보기엔 모든 종교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똑같은 지혜를 각기 다른 비유와 말로써 전달하려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 왜 그렇게 춤을 추세요? 얘야. 그건 말이다, 사람은 팽이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란다. 존엄성과 고귀함과 평형을 잃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움직여야만 하지. 사람은 스스로를 해체함으로써 자기를 만들어 가는 거란다. 

    본래의 우리는 어디로 갔을까? 어느 것이 우리의 참모습일까? 나는 이런 것을 내 마음 깊은 곳에 감추어 두었던 것일까?

    우리가 무엇 때문에 옹색한 살가죽과 고통에 찬 육신과 어처구니없는 근심으로 가득 찬 뇌로 되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무지한 사람들을 개선시키려면 자기들이 무지하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는 방법밖에 없어요. 내 덕분에 온갖 잘못을 범하는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화를 낼 때, 그는 사실은 당신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나 있는 것이다.

    진정한 자아는 어머니와 나를 연결해 주던 통로에 있다고 한다. 바로 배꼽이다. 그 곳을 통해 우리는 자양과 피와 힘을 받았지만, 출생과 더불어 문이 닫혀 버렸다. 배꼽은 중력의 중심, 즉 우리의 진정한 중심이라는 것이다.

    남의 이야기를 들으며 지식을 축적하는 일을 계속했다. 물론 그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여전히 없었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축적한 지식을 조금도 방출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착한 게 아니에요. 이기적인 거예요. 오로지 자기들 카르마만 걱정하고 있어요. 그들이 선행을 하는 것은 오로지 내생에서 좋은 지위를 차지하려는 이기심 때문이에요. 참으로 따분한 세상이에요!

    내 삶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언제나 착하게 굴었다. 악하게 살려면, 남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고 남의 방어 행동을 고려해야 하며 남을 괴롭힐 수 있는 못된 짓을 구상해야 한다. 그러나 착하게 살면 남을 간섭하지 않고 남의 간섭도 받지 않으며 살 수 있다. 친절은 조용히 살기 위한 가장 편안한 방법이다.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욕망 이상으로 의식하지 못하는 욕망과 두려움이 존재한다. 행동은 그저 욕망이 구체화한 것일 뿐이다.

    인간이 지닌 신성을 어떻게 처리할지 그 방도를 말하마. 그것을 인간들 자신의 가장 깊숙한 곳에 감추기로 하자. 그곳은 신성이 감추어져 있을 거라고 도저히 생각하지 못한 유일한 곳이니라.

    어머니 뱃속에서 그는 이미 세계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세상에 나오기 직전에 천사 하나가 내려와 그가 비밀을 발설하지 못하도록 단속을 한다. 천사는 태아의 입 위에 손가락을 대고 쉬라고 말한다. 그럼으로써 태아는 모든 것을 잊는다. 위대한 비밀을 어렴풋하게나마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의 무의식뿐이다. 우리가 인중이라고 부르는 곳. 즉 코와 윗입술 사이에 오목하게 골이 진 곳은 바로 그 천사와 접촉했을 때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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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에 살면서 베르나르베르베르씨를 한번쯤은 볼 수 있겠지?

    고등학교때인가 나무랑 뇌인가.. 읽었던 기억은 있는데 그때 적잖이 충격받았다. 그의 창작의 원천은 어디서 나올까? 그림을 그릴때도 글을 쓸때도 내게 이런류의 독창성을 기대하긴 어려워서 나와 다른편에 서있는 사람같다.  옷장 속에 사놓고 입지 않아 구석탱이에 방치된 옷,    죽음은 꼭 그와 닮았다. 가끔씩 옷장 문을 열고 그것이 안에 있구나 확인하게 된다. 그것을 언제 입을지 모르겠지만, 언제나 내 삶에 가까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한다. 각자 믿는 종교마다 죽음 이후에 형태는 달라질 것이지만, 나는 종교 그것을 뛰어넘어서 내 간절한 소망으로써 영혼이란게 꼭 있기를 바랐다. 생각이란건 애증과도 같은데, 생각이 멈춘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지옥이 아닐까? 우린 무의식의 영역이라는 꿈에서 조차도 나름 생각이란걸 하지 않는가 근데 생각해보니 꿈은 어느 영화 한편이 상영되는 것 같기도 했다. 시나리오는 내가 머릿속에 넣어놓은 방대한 양의 정보들을 짜집고 편집하여 만들어진 것. 그리고 매일 밤 이 영화들을 한편씩 상영해주는 것이다. 관람자는 나 뿐이다. 근데 그 유일한 관람자마저 아침에 눈을 뜨고 나면 80퍼센트를 잊어먹고야 만다. 왜냐면 터무니없고 기승전결도 없고 도무지 연관성 없는 것들의연속이라서 말이지. 그렇다고 좌절할 뇌가 아니지 지금쯤 얘는 또 시나리오 구상중일거다. 오늘은 어떤 꿈을 꾸게 될까, 그래도 내가 얼마나 잠을 깊이 못자는 사람이냐면 꿈에서 요즘은 꿈임을 인식하기도 한다. 그래서 뺨을 직접 때려봤는데 아프지 않아서 진짜 신기했다. 현실만큼은 아니지만 꿈에서도 나름 생각을 한다는게, 그정도의 생각만이라도 주어진다면 죽음을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텐데. 그래도 이 소설을 읽는동안 그가 수필을 썼던거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할 정도로 죽음은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였다. 그리고 너무 많은 진실을 알고 있는게 그리 좋은 것도 아니라는걸. 우리의 일생에 했던 업보가 나중에 심판 받는다면 ? 그게 진짜 사실이라면? 친절은 조용히 살 수 있는 가장 편안한 방법이다. 나는 심판 받을 것이 두려워 친절을 베푸는 것은 아니였지만, 어느정도 그런 일종이었다고 생각한다.누군가가 나를 간섭하기를 원하지도 않았고 나도 누군가를 간섭할 만큼 관심있지도 않았기에. 어느정도의 친절은 어느정도의 선긋기와 같은 것이었다. 넘어오지말라는 무언의 행동이었다. 악은 선을 위해 필요할까? 악이 없으면 선도 없는 것일까? 선이 어떤 목적따위를 위한 선이 아니라 선 그 자체를 대변하는 선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악이란게 누군가한테 피해주지 않는 악이 존재한다면, 자신 스스로를 버리는 악은 허용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만약 선을 위한 필요악이 존재해야한다면- 난 그런의미에서 술마시고 음주운전하는게 마약하는 사람들보다 더 나쁘다고 본다. 심벌론에서도 나왔던 얘기와 비슷했는데 신성을 밖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서 찾으라는 것. 어떻게 보면 이 말은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내 자신을 신보다도 위대하게 만들어주는 말이다. 새로운 대륙을 발견한 콜롬버스처럼 지구가 둥글다는 갈릴레오 갈릴레이 처럼 사후세계라는게 진짜 존재할 수 있지도 않을까?? 어떻게 보면 이 넓은 우주에 그 작은 지구에 존재하는 우리 밖에 없다는 생각이 더 우스웁지 않을까세상에 똑똑한 사람들 차고 넘쳤을텐데 이들처럼 무의식을 이용해 어느 다른 세계로 가는 실험을 해본 이들은 없었을까? 오래 살게되면 더 바랄거 없이 죽음에 대한 수수께끼가 조금 풀려졌음 좋겠다. 그럼 두려워말고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텐데

    아 설렁탕에 깍두기 담궈 먹고싶다..갑자기... 이러다 아사로 죽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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