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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식인을 위한 변명(Plaidoyer Pour Les Intellectuels) / 장폴사르트르-박정태 옮김
    읽다 2019. 5. 8. 08:45

    네.. 핸드폰 카메라 고장나서 맥북 카메라로 연명해 살아갑니다..

    올해에는 꾸준히 사르트르 책을 읽어볼 생각이다. 엄청 난 변화인 셈인데, 그 이유인 즉슨 추리소설을 하도 읽다보니 뻔하디 뻔한 플로우에 질려버렸다. 그런 차에 우연히 본 사르트르의 글 몇 문장에 적잖은 충격을 받아, 그의 책을 다 읽어보겠노라 생각했다. 자극적인 위주의 문장들을 읽다가 이런 책을 읽으니 문장 해독력이 현저하게 떨어져있음을 실감했다. 실제로 어려운 단어들과 문장구조의 연속이었다 내게는.. 근데 방금 찾아보니 그는 비교적 쉽게 글을 쓰고 말하는 사람이었다고 하네요...(심지어 글로 옮기신 분은 고등학생에게 맞춰 쉽게 적었다고...) 조금 충격.. 한없이 작아지는 나,,,아무튼 이것은 40년 전 일본에서 있었던 강연을 바탕으로 나온 책이고 강연 중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주석으로 많이 달아주셔서 이해하기가 조금 수월했다. 이 책을 완전히 소화하진 못했다. 대략 절반도 이해 못 한 것 같아, 이걸 적으면서 천천히 정리해보아야겠다. 

    책을 다 읽고 사르트르에 검색하던 중 https://www.youtube.com/watch?v=wiuk7utnes0 영상을 찾았다. 5분 정도의 시간으로 철학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채널이네! 시간날 때마다 종종 봐야지! 살면서 학문만 쌓고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돈걱정없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 본질은 그것의 존재의 이유. 동기나 목적.하지만 인간은 그런것이 없다 그냥 태어났으니까. 피투가 된 존재. 실존한다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인간은 자유다 어떤 제약 없이 어떻게 살아야 할 목적도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선택하는 기로에 놓일 때면 어렵다. 인간에게 주어진 목적이나 기능이 없으니 답도 없고 그래서 선택은 매번 어렵다. 불안한 존재. 불안을 피한 자기기만, 자신에겐 이것말고 선택지가 없는것처럼 자신을 속인다. 하지만 답은 모두가 답이다. 내가 선택한게 내가 가치가 있는것. 그게 답이된다. 그것이 정답인양 행동하면 돼요! 인간은 피투성으로 태어났지만 기투하는 존재.앞으로 나아가는 능동적 존재) 아마도 이건 그의 실존주의 관련 서적을 읽어보면 더 이해가 갈 것 같다>

    책은 크게 세 가지 카테고리로 나뉜다

    1.지식인이란 무엇인가? 여기서는 다시 두가지로 나뉘어

    1-1 지식인의 상황    1-2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2. 지식인의 기능.  세가지로 나뉘어

    2-1 모순    2-2 지식인과 대중    2-3 지식인의 역할.

    마지막은 

    3. 작가는 지식인인가?

    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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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지식인이란 무엇인가? 

    1-1 지식인의 상황 

    p9지식인에게는 경제적 또는 사회적 권력이 없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모든 것을 판단하도록 부름 받은 엘리트라고 자처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가 않은 것입니다. 지식인의 도덕주의와 이상주의는 바로 이런 무기력한 상황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지식인이 마치 머나먼 미래 속에서 이미 생활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미래의 추상적인 관점을 가지고 우리의 시대를 판단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지식인을 독단주의자라고 겨냥한다 (맑스주의) 하지만 여기서 모순은 부딪힘. 맑스주의는 도덕주의와 대립되기 때문에. 하지만 사람들은 이 모순에 신경쓰지 않고, 정치인의 현실주의를 내세우며 맞선다. 이런 모순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비판의 공통된 의미는 지식인은 자신과 무관한 일을 쓸데없이 참견하는 사람. 이란 점이다. 사회에서 보편 개념이란 불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명분을 내세우며 자신의 명성을 남용하여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이라고 지식인을 보기 때문에 불만이 오는 것임.

    그렇다면 지식인은 무엇이길래?

      1-2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p17

    모든 인간은 *기투쇼에 해당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아직 없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서 이미 있는 것을 발명하기 때문에 창조자이며, 인간은 기도를 훌륭하게 성사시키는 데 필요한 여러 가능성을 엄밀하게 규정할 때만 일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에 학자인 것입니다.

    *기투는 현재를 넘어서 미래를 향해 자기를 던지는 인간 실존의 존재 방식을 의미하는 말로서, 하이데거의 존재론의 중요한 개념이자 또한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의 기본을 이루는 개념.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이 세상 속에 던져진 존재. 즉 피투된 존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은 미래를 향해 스스로를 던짐으로써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존재, 즉 기투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여기서 사르트르는 더 나아가, 인간은 본래적이라고 할 만한 그 어떤 본질도 없는 부조리한 존재이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전재이다. 그로서 미래의 다양한 가능성에 직면하고 스스로를 선택하고 기투하는 존재.

    p19

    목표는 지배계급에 의해서 정의되고 노동계급에 의해서 실현됩니다. 

    부르주아지의 성장과 함께 지식을 가진 전문가가 등장하게 됩니다. 부르지아지라는 이 상인계급은 그 자신이 계급으로 구성되는 순간부터 교회와 갈등을 빚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내세우는 원칙이 상업자본주의의 발전을 가로막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상인계급은 자기 고유의 이데올로기를 정의하려는 생각없이 성직자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고 보존했습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상인계급은 자기의 자식들 중에서 상인계급의 기술적인 보조자와 상인계급의 옹호자를 길러냈습니다. 따라서 이 수단에 관한 전문가들은 부르지아지에 의해서 부르주아지 속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의 계급도 엘리트도 그 어떤 이데올로기의 수호자도 아니었습니다.

    *사회 원자론은 사회와 개인 중에서 실재한는 것은 원자적 개인 뿐이라고 주장하는 학설이다. 개인이 사회보다 우선한다는 이 학설은 사회 계약설을 지탱하는 근거를 이룬다. 방면에 사회유기체론은 생물 체제와의 비교를 통해서 사회를 생물 유기체와 비슷한 존재로 보는 학설을 말한다. 이 개인은 사회를 떠나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이는 당연히 사회계약설의 혁명적 성격에 강력히 반대한다.

    p29

    부르주아계급에서 탄생항 철학자들이 바로 그 부르주아 계급의 객관적 정신을 표현하는 과업을 떠맡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때 이러한 유기적 일치는 과연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우선 이 철학자들이 부르주아계급에 의해 태어났고, 부르주아계급의 성공을 통해 지탱되었으며, 부르주아계급의 풍습과 사유에 물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이로써 이의를 제기하는 정신, 권위주의의 거부, 자유로운 상업에 채워진 족쇄의 거부, 과학 법칙의 보편성, 봉건적 특수주의와 대립되는 인간의 보편성 등, 이 모든 가치와 관념은- 이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볼 때 모든 인간은 부르주아이며 또 모든 부르주아는 인간이라고 하는 두 공식으로 귀결되기 마련입니다- 결국 한가지 이름을 갖게 됩니다. 그 한 가지 이름이란 바로 *부르주아 휴머니즘입니다

    *자본주의의 이익을 대변하는 휴머니즘을 뜻한다.

    p31

    지식인을 정의하기 위해서 우선 지식인이라는 이 사회적 범주가 현재 지니고 있는 성격부터 열거해보아야 합니다

    1.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는 위로부터 모집된다. 그는 더이상 지배계급에 속하지 않습니다.오히려 지배계급은 고용을 결정함으로써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를 그의 존재 속에 임명합니다.

    2.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의 이데올로기적, 기술적 교육 또한 위로부터 구성된 체계에 의해서, 따라서 그 자체가 필연적으로 설별적일 수 밖에 없는 체계에 의해서 정의됩니다. 즉 지배계급은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에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제공해주는 방식을 통해서 교육을 통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ㄱ) 지배계급 자신이 적당하다고 판단한 이데올로기 ㄴ)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로 하여금 그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줄 앎과 실천. ㄷ) 계급 간의 관계가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의 선별을 자동적으로 조절함. 

    따라서 지배계급은 실첮겅니 지식을 가진 전문가에게 선천적으로 두가지 역할을 가르치고 있는 셈입니다. 첫 번째는 지배계급은 그를 연구 전문가이면서 동시에 지배계급이 가진 *헤게모니에의 봉사자, 즉 전통의 수호자로 만들고 있습니다. 두 번째 그를 상부구조의 관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헤게모니는 일반적으로 한 국가, 집단, 문화가 다른 국가, 집단, 문화에 대해 갖는 지배권 또는 패권을 의미한다.  성공적인 헤게모니는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변함과 동시에 피지배계급으로 하여금 지배계급의 이익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결국 그들은 지배계급에 의해서 그들의 가치관을 전파하고 다른 모든 계급과 맞서 싸우는 임무를 받게 되는 것임. 이데올로기적 특수주의의 선동가라고도 할 수 있음. 하지만 그들을 지식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것은 아님. 왜냐하면 여기에서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는 실제로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을 마치 과학 법칙인 양 부당하게 왜곡하고 있기 때문임. 그들은 보통 중간계급의 중간층에 속하는 가정에서 태어나서 지배계급의 특수주의 이데올로기를 주임받아 왔기 때문에, 결국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를 중간계급에 속하게 만듦. 그의 운명은 결국 밖에서부터 정해진 것이고, 그의 활동과 관련된 일반적인 목표도 결국 그 자신의 목표가 아니게 됨.

    p38

    그렇지만, 지식인이 등장하게 되는 것은 정확하게 이 수준에서입니다.

    1.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는 어린 시절부터 휴머니스트였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그에게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밍계끔 가르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되돌아볼 경우, 그는 자신이야말로 인간 조건의 불평등의 증거임을 깨닫게 됩니다. 

    2. 국가 정치 지배계급에 복종해야 한다는 이 특수주의적인 이데올로기와 자유롭고 보편주의적인 이 탐구 정신이 결국에는 이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 속에서 추돌을 일으키고야 마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과학적 기숙적 사유는 오로지 통제 아래에서만 사유 자신의 보편성을 전개해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특수주의에 부릎을 꿇어버린 과학은 그 자신이 보편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자유로우며 엄격한 자신의 보편적인 핵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3. 지배계급의 목표가 무엇이 되었든 상관없이 전문가의 행위는 우선 그 자체가 실천적입니다. 이 말은 그의 행위가 유익한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그들은 부르주아 학문이란 없다고 단언하지만 그들의 학문은 그 자체의 학계로 인해 부르주아적임. 그러나 탐구하는 순간은 자유롭게 작업하는 사실이며, 그 사이에 괴리에서 고통스러움. 결국 서로를 부정하는 이 방법들이 결국에는 지배계급에 의해서 추성적으로 제기된, 방법들을 통합한 단위인 목표를 중저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 따라서 지배계급에게 탐구자는 필수불가결한 존재인 동시에 수상쩍은 존재. 이러한 사실로붙 두가지 가능성이 열림. 지식을 가진 전문가들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고 만족할 수도 있음. 한편으론 그것을 만족할 수 없을 때, 여기서 어떤 괴물이 탄생. 자신과 관계된 일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지식인 그렇지만 다른 사라믈이 자신과 무관한일에 쓸데없이 참ㅁ견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바로 그 지식인이 될 수 있음. 

    *헤겔이 말하는 불행한 의식은 노예와 주인의 관계에 신이 개입할 때 발생한다. 우선 신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 노예도 주인도 차별 없이 모두가 평등하다. 이렇게 노예는 신 앞에서 자신의 보편성을 획득한다. 핮미ㅏㄴ 현실로 돌아오면 부정 할 수 없는 차별이 존재한다. 즉 주인과 노예의 주종 관게가 굳건히 남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노예는 자신의 상태에서 모순을 느끼며, 이러한 노예의 의식은 결국 불행한 의식으로 존재한다. 

    p51

    결국 지식인을 가진 모든 전문가는 잠재적인 지식인에 해당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보편주의적 기술과 지배 이데올로기가 자신 속에서 항구적으로 싸운다고 할때의 바로 그 싸움, 즉 그 모순에 의해서 정의되기 때문입니다.

    p54

    지식은 역사적 산물입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그 어떤 사회도 자기 자식을 비난하지 않고서는 결코 그 사회의 지식인에 대해 불평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회는 오로지 그 사회가 만들어낸 지식인만을 갖기 때문입니다.

    2. 지식인의 기능

    2-1 모순 

    #지식인은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에 자신의 기능을 부여받지도 않고 ,어떤 지위가 있지도 않음.

    p59 

    사회가 지식인을 만들어내는 한 , 지식인은 자기 자신을 사회 속에서 파악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지식인이 자기 자신을 파악하는 이 작업은 오로지 그가, 어떤 특정한 순간에 사회가 지식인을 만들어낸다고 할 때 의 바로 그 사회전반을 연구할 경우에만 가능한 일이 됩니다. 결국 이렇게 해서 끊엄없는 전복이 발생합니다. 자기 자신을 세계에 되돌려 보내고, 또 세계를 자기 자신에게 되돌려보내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철학자들 자신이 그 사회에 살고 있다는 점에서, 자신들을 만들어낸 계급 자체를 위하여 봉사하는 유기적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철학자들이 말하는 보편성은 스스로를 보편적인 계급으로 여기고 있었던 부르주아계급의 거짓된 보편성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런 오류가 발생한 것임.그들이 탐구하여 도달한 인간도 결국 단지 부르주아만을 가르킬 뿐. 

    p64

    이러한 의미에서 지식인은 지식을 가진 전문가의 작ㅇ버을 통해 또 자기의 봉급과 삶의 수준을 통해 자기 자신이 선택된 프티부르주아임을 끊임없이 되새기면서 자신의 계급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자기고유의 영역 속에서 보편성이 결코 완결된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오히려 보편성은 계속해서 만들어가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보편의 전문가입니다.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와 동시에 자신 속에서 그리고 자신의 바깥으로부터 인간을 만들어가야 할 존재로서 파약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식인은 순수 보편으로만 생활하며 오로지 '지적인'가치만을 아는 추상적인 존재. 머리만 큰 사람이라는 비난은 이제 의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p67

    외적으로는 계급 구조가 낳은 사회적 금기를 제거하고 내적으로는 심리적 억압과 자기비판을 제거함으로써 소외 현상을 없애며 사유의 진정한 자유를 실현하고자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오로지 지적인 가치만을 아는 추상적인 존재라고 지식인을 비난하는 것과는 정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의 특이한 보편이 특이한 보편들에 대해서 행하는 이러한 변증법적 작업은 무엇보다도 먼저 추상적인 것 속으로 끌려들어가서는 결코 안 되는 것입니다. 

    p70

    사이비 지식인과 진정한 지식인과의 공통점은 있습니다. 즉 근원적으로 보면 그 또한 진정한 지식인과 마찬가지로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인 것입니다. 사이비 지식인은 오로지 관리가 갖는 권력만을 고려하길 원합니다. 처음에는 지식인의 태도를 취하며 지식인과 마찬가지로 지베계급의 이데올로기에 이의를 제기해봅니다. 하지만 그들은 진정한 지식인처럼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p74

    지금 당장 보편적인 관점을 취하는 이들은 우리에게 안도감을 줍니다. 왜냐하면 사이비 지식인에 의해서 보편적인 것이 이미 성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지식인은 우리에게 불안감을 줍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보편적인 인간이란 만들어가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p76

    진정한 지식인은 그날이 오면 지식인이 사라지게 되리라는 것, 또 사람들이 자유를 마음껏 누리면서 그 어떤 모순도 느끼지 않은 채 실천적인 지식을 획득할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을 확실하면서 모든 사람이 진정으로 자유롭고 평등해지며 형제처럼 될 그런 사회적 보편성이 언젠가는 가능해지도록 하기 위하여 일을 하는 것입니다. 

    #

    결국 근원은 같을 수 있어도, 사이비지식인은 피억압자편에 자신의 시선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이득을 취하며 보편성을 완결시켜놓는다고 볼 수 있음.

    2-2 지식인과 대중

    #지식인은 고독함. 왜냐면 아무도 그에게 어떠한 자리를 주지 않기 때문임. 만일 그가 미래를 알기 위해 미래 속에 자리잡기를 주장하면 그건 그 자신 속에 지닌 편견을 통한 것에 불과할 수 있음. 또한 그가 만약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판단한기 위해 사회 바깥에 관념적으로 자리잡으려고 시도한다면 이 역시 바깥으로 나간 꼴이 되고, 잘못하면 중간계급 위에 군림하면서 내려다보는 부르주아지에 자신을 일치할 수 도 있음. 따라서 지식이 자신이 사는 사회를 잘 이해하는 방법은 유일함. 그건 바로 가장 헤택 받지 못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것. 그들이 보편성을 대표하진 않지만, 억압과 착취에 의해 특수화된 거대한 다수를 대표함

    p80

    객관적인 지성은 사회를 바라보는 피착취계급의 관점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입니다. 피착취계급의 정책이 어떤 것이 되었든 상관없이 이 관점은 유일하게 급진적인 관점입니다. 급진화에 가장 적합한 가장 낮은 수준으로부터 출발하여 사회를 바라보는 민중의 사유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p81

    지식인은 밑에서 위를 바라봄으로써 자기의 계급을 다시금 부정해보지만 자기의 계급에 의해서 이중으로 조건이 주어진 자기 자신을 보게 되며, 또한 자기으 ㅣ봉급이나 사례금을 민중 계급이 생산하는 잉여가치로부터 뽑아낸다는 점에서 자기의 무게 전체를 떠받치는 민중계급위 에 서있는 자기 자신을 보게되는 것입니다.바로 이때 지식인은 자기가 처한 상황의 애매함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될 것이빈다.  그리고 대중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대중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우상을 무너뜨리는 일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 지식인은 이제 자신에게 남아있는 개량주의적 환상을 포기하면서, 스스로 급진적이 되어 혁명가가 될 것입니다. 

    p87

    프티부르주아 지식인들이 그들 고유의 모순 때문에 노동계급을 위하여 일한다고 할 때, 그들의 모든 책임은 홀로 떠맡으면서 그계급에 봉사하는 셈입니다. 그들읜 노동계급의 이론가가 될 수는 있어도 결코 그 계급의 유기적 지식인이 될 수 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닌 모순도, 비록 그 모순이 명확하게 밝혀지고 이해된다고 할지라도 끝까지 남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지식인들은 그 누구로부터 위임장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2-3 지식인의 역할

    p89

    지식인이 민중에게 봉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정확하게 이 계급의식의 수준에서입니다. 물론 지식인이 민중에게 할 수 있는 이 봉사는 결코 보편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로서 하는 봉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식인도 " 헤택 받지 못한" 계급도 모두가 다 상황속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식인은 정확하게 말해서 특이한 보편자로서는 봉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식인에게 있어서 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결국 계급에 대한 지식인 자신의 특수주의를 드러내는 일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보편성의 임무를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디ㅏ. 지식인이 처한 입장이 이와 같을진대, 과연 그 누가 이처럼 특수한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지식인, 자신의 특수성을 극보하면서 특수한 것의 보편화를 향해 나아가는 지식인을 반박할 수 있겠습니까.

    p90

    지식인이 처한 근원적인 상황 때문에 그리고 지식인이 형성되어가는 과정 때문에 새로운 형태 아래에서 계속 부활하며 끊임없이 재등장하게 되는 이데올로기에 맞서서 지식인이 부단히 싸워야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싸움을 수행하기 위해 지식인은 다음의 두 방법을 동시에 사용해야만 합니다. 1. 끊임없는 자기 비판. 그들은 자신이 규제를 벗어난 프티부르주아임을 의식해야 하며, 또 자신에게 자신의 계급에 대하여 사유하고자 하는 끊임없는 유혹이 도사리고 있음을 의식해야 합니다. 2 혜택받지 못한 계급의 행동에 구체적으로 그리고 거리낌 없이 참여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애매한, 위치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위임장을 받지 못한 존재이듯이, 지베계급에 있어서는 그들은 배신자처럼 보이기 때문에 추방되고, 혜택받지 못한 계급으로부터는 자신들의 위치가 아닌 이들이라는 관점하에 의심을 받을 수 있음. 그렇다면 그래서, 그들은 과연 무엇을 하는 것일까?

    p94

    1. 민중 계급 속에서 이데올로기의 계속적인 재등장과 맞서 싸우는 일입니다.

    2. 지배계급에 의해 주어진 지식-자본을 민중 문화를 고양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일입니다.

    3. 주어진 현실의 상황 속에서 필요한 경우,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가들을 혜택 받지 못한 계급 속에서 형성하는 일이며, 또 이 전문가들로 하여금 노동계급의 유기적 지식인들이 될 수 있도록 또는 적어도 유기적 지식인들에 가장 근접한 전문가들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일입니다.

    4. 눈 앞의 과제를 넘어 보다 멀리 있는 과제를 보여줌으로써, 즉 노동 계급의 역사적 목표로서의 보편화를 보여줌으로써 진행 중인 행동을 급진적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5. 모든 권력에 대항하면서 대중이 추구하는 역사적 목표의 수호자가 되는 일입니다. 

     

    #정리하자면 지식인은 실천적인 지식을 가진 대리인이며, 그는 자신의 주된 모순( 직업에서 비롯된 보편주의와 그의 계급에서 비롯된 특수주의가 일으키는 모순) 으로 인해서 혜택 받지 못한 계급의 보편화를 지향하는 운동에 가담. 그렇지만 그들은 어느 계급에도 속하지 못하는 모순을 깨닫고, 민중 정당 속에서 존재하기도 하지만, 그곳에서도 유대감과 소외감을 동시에 느끼며 어디가나 동화가 불가능한 존재.

    p101

    하지만 지식인의 모순이란 곧 인간 각자가 지닌 못누이요, 사회 전체가 지닌 모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목표를 도둑맞은 채, 모든 사람이 자신들을 벗어나는 따라서 근본적으로 비인간적인 그런 목표의 도구로 전락해버렸습니다. 또 모든 사람이 객관적인 사유와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을 괴물로 만들고 노예로 전락시켜버리는 이 같은 야만스런 사회를 다시 인간의 손으로 통제할 수 있도록 해줄 반성적인 의식을 갖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지식인은 자기 고유의 모순- 이 모순은 그의 기능으로 바뀝니다- 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의식을 취하는 일을 하도록 압력을 받고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서 의심을 받는 존재인 동시에 모든 사람을 위하여 반성적인 의식을 취하는 일을 수행하는 존재.

     

    3. 작가는 지식인인가?

    p118

    글을 쓴다는 것은 언어를 소유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에 못지않게 언어 자체가 작가와 다르며 사람들과 다르다는 점에서 언어를 소유하지 않는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실천적 타성태

    한 개인이 사회 속에 실존하기 이전에 그의 선조들이 그들의 삶의 실천을 통해 이미 만들어놓은 사회적 유산으로서, 그 개인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매개물인 언어의 '단순한'매개자로 언급되는 것은 언어 자체가 바로 이 실천적 타성태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p122

    롤랑바르트는 글쟁이와 작가를 구분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글쟁이는 정보를 전달하기 위하여 언어를 사용합니다. 작가는 공통의 언어의 수호자이지만, 그는 글쟁이보다 훨씬 멀리 나아가며, 또 그가 사용하는 재료는 비-기표로서의 언어 또는 정보 왜곡으로서의 언어입니다. 말하자면 작가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의미 작용과 비-기표를 수단으로 취하면서, 단어의 물질성에 의거하여 작업을 통해 그 어떤 언어 대상을 생한하는 장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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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가 의미 작용을 하는 내용으로 객관적인 세계를 겨냥하는 경우. 위에서 내려다보는 고공 의식을 갖게 됨. 다른 한편으로는 작가가 자기 자신과의 완벽한 공모 속에서 환상을 쓰는 경우. 작가의 조건을 결정하는 세계를 제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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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멜를로퐁티는 우리는 보이는 사람이기 때문에 보는 사람이라고 말함. 이것은 세계가 우리를 보는 사람으로 구성하기 때문에 우리는 눈 앞의 세계를 볼 수 있는 것임. 

    *세계 내 존재

    하이데거의 용어로, 세계 속에서 다른 '존재자'와 관계를 가지면서 존재하는 인간, 그러면서도 또한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인간(현존재)이 세계와 더불어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본질적인 구조를 말한다. 세계 속에 살고 있는 현존재는 세계를 도구적인 관점에서 분석한다. 일상적인 삶에서 세계 속 모든 존재자는 우선 현존재의 목적 실현을 위한 도구로 드러나는 것이다.그리고 한 존재자가 어떤 용도를 지닌 도구로서 드러나게 되면, 그 도구-존재자는 다른 존재자와 함께 연속적인 지시 관계를 구성하게 되고 이에 따라서 세계는 이제 총체적인 지시 관계로서 파악되게 된다. 예를들어 망치는 못을 박기 위해 있다 (도구로서의 망치의 용도)그러나 이 망치가 현존재의 목적실현에 비추어 지금 당장 사용되지 않을 경우, 다시말해 다른 존재자와 연속적인 지시관계를 구성하지 않을 경우, 망치의 존재는 무이며 망치는 이제 단순한 물질성으로만 머물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존재의 목적 실현을 위해서 망치가 다른 존재자와 연속적인 지시 관계를 구성할 경우, 망치는 마침내 현존재의 목적 실현 속에서 자기의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나는 세계의 한 부분 또는 생산물이고 따라서 나는 세계를 표현하지만 오로지 내 스스로가 세계가 된 경우에만 이 세계를 표현할 수 있다. 세계-내 존재란 세계와 현존재 사이의 바로 이러한 공속 관계를 말한다. 존재자는 현존재의 관심을 통해서만 자기의 존재 의미를 갖지만, 현존재는 스스로 자기의 존재 의미를 묻는다. 다시말해 현존재는 존재좌아 달리 스스로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다. 현존재 자신의 고유한 존재 가능성이야말로 진정한 자기로서 현존재의 궁극적인 관심이자 현존재의 존재 의미이다.

    p139

    책을 읽음으로써 독자는 간접적인 방식을 통해서 보편적인 특이함이라고 하는 독자 고유의 실재성으로 되돌려 보내져야만 합니다.독자 자신을 동일한 전체의 또 다른 한 부분으로서, 자신을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의 또 다른 한 포착으로서 실현시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p144

    즉 내가 공통의 언어를 말하는 경우, 이와 동시에 또한 타인으로서의 내가 공통의 언어에 의해서 말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안녕하세요, 어떻게 지내십니까? 내가 이렇게 말을 하자마자, 이미 나는 내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인지 아니면 언어가 나를 사용하는 것인지 더이상 알지 못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내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내가 다시 보게 되어 반가운 사람에게 언어의 특수성 속에서 인사하기를 원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언어가 나를 사용한다는 것은 나를 가로질러서 나타나는 담화의 어떤 한 공통된 장소를 단지 내가 다시 현실화 시키는 일만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나는 계속되는 대화 속에서 나의 의도가 형태소들의 분절된 총체에 의해서 빗나가고 제한되며 배반되고 풍부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p150

    문학작품은 세계가 생산한 어떤 한 특이한 부분을 매개로 삼아서 세계가 세계 자신에게 하는 폭로를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폭로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특이성을 발생시키는 것으로서의 보편적인 것을 도처에서 제시하게 되며, 또 역으로 보편적인 것의 굴절과 비가시적인 경계로서의 특이성을 파악하게 됩니다.

     

    p156

    작가의 참여는 공통의 언어 속에 포함되어 있는 정보 왜곡의 부분을 활용함으로써 소통이 불가능한 것을 소통하는 일을 겨냥합니다. 또 작가의 참여는 전체와 부분 사이에서, 전체성과 전체화 사이에서 세계와 작품의 의미로서의 세계-내-존재 사이에서 긴장을 유지하는 일을 겨냥합니다. 이처럼 작가는 그의 직업 자체 속에서 특수성과 보편적인 것의 모순에 직면해 있는 것입니다. 다른 지식인은 자신의 직업에서 비롯된 보편주의적 요구와 지배계급에서 비롯된 특수주의적 요구 사이의 모순으로부터 자신의 기능이 태어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작가는 자신의 내적인 과업 속에서 삶을 확인하는 보편화를 암시해가면서 그 자신이 직접 체험의 차원 위에 머물러야 하는 의무를 발견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작가는 다른 지식인처럼 우연히 지식인이 된 게 아닙니다. 그는 본래부터 지식인인 것입니다.

    즉 작품 그자체가 작가로 하여금 작품을 벗어나서 이미 다른 지식인이 자리를 잡고 서있는 실천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작품은 절대적인 가치로서의 삶을 체험적으로 확인하는 것이자 다른 모든 자유에 호소하는 그 어떤 자유를 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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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머리 쓰면서 정말 재밌게 읽은 것 같다. 다 읽고나서 책의 첫 장을 다시 들여다 보면 이제서야 그의 책의 제목이 왜 지식인을 위한 변명인지 이해가 간다. "사람들이 지식인에게 던지는 비난만을 놓고 본다면, 지식인은 분명 큰 죄인임이 틀림없습니다" 지식인이 누구인지, 그들이 우리 사회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책을 다 덮고나면 이것이 해결된다. 그가 했던 변명은 내게는 성공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소 지식인이라는 것은 까다로운 조건이 많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 사이비 지식인들. 거짓된 보편성. 허울뿐인 보편성. 그들이 말하는 보편성은 닿으면 부셔질 유리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렇게 모순된 세상 속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진정한 지식인들은 계속해서 고독히 보편화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지배계층에 반대편에 서서. 의심받고 배반당했다고 손가락질 받아가며 그렇게 말이다.  40년 전의 강의이지만 아직도 사이비지식인들은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지식인인척 하지만, 실은 지배계층의 밑에서 그들이 말하는 보편성을 위해 힘쓰는 이들. 그들의 수호자. (이는 이 모순을 깨닫고 싸우려는 지식인과는 전혀다르다. 이런 부분에서 그의 변명이 잘먹혔다는 것이다)

    내가 하고 싶어하는 것들 목표, 이 모든 것은 내 자의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였을까. 이 것도 결국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운명. 지배계급이 바라던 바였을까? 하지만 그가 실존의 의미를 통해 했던 말처럼, 인간은 피투로 태어나지만 기투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런 점이 나에겐 꽤나 희망적으로 들린다.

    책의 작은 부록처럼 주석을 통해서 습득된 여러 지식들이 나를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습니다! 다음은 존재와 무를 읽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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