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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 / 장폴 사르트르읽다 2019. 5. 26. 08:46
읽는 동안 네이버 사전을 무조건 켜놔야 했다.. 관념론, 존재론, 대자 타자. .이런 낯선 용어들이 도저히 머릿 속에 정립이 되지 않아 끊임없는 검색의 연속이었으나 그 단출인 그 내용마저도 어려웠다. 정말이지 미학에서 등장하는 몇가지의 철학들이 재밌다고 다음 생엔 철학을 해보고 싶다-다음생을 믿는건 아니지만 있었음 좋겠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있어서 믿고자 한다-혹은 전생에 철학을 하고 있지 않았었을까 했던 이 얄팍한 생각들을 접을 수 있었던 절호의 순간들이었다. 지식인을 위한 변명보단 훨씬 좋았던건 내가 가장 관심있었던 타인과 자신. 그 존재와 관계에 대한 내용들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내 작업에 가장 큰 영향을 주지 않을까 기대도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프랑스 사람이다 보니 곳곳에 개념들이 불어로 나오는데 언어 연습도 되고 좋네욤 ㅎㅎ,,,
1부 사르트르와 존재와무의 주변
작가에 의해 창조된 문학 작품은 그것 자체로 완결되어 있고, 이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들은 이 작품을 창조한 작가에 의해 필연적인 법칙 하에 배열되어 있다. 작가가 죽은 후에도 다른 사람ㄷ를은 이 작품에 어떤 변형도 가하지 못하는 것으로 남아 있게 된다. 그리고 작가는 이 작품과의 관계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존재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사르트르는 철학에 비해 문학에 더 가치를 두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20세기 전반기에 발발헀던 두 차례의 전쟁은 인간이 인간에 대해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고, 또 부여했던 신념과 의미를 한꺼번에 무너뜨렸다. 예컨대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며, 이성을 신뢰하는 합리적인 주체이며, 다른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삼는 도덕적 존재라는 등의 신념들이 완전히 붕괴되었던 것이다. 기독교적 전통에 익숙해 있던 서구인들은 자신들의 행동 기준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모른 채 불안과 정말 속에 헤매게 되었으며, 결국 이 세계에서 신에 의해 버림받은 채 내버려진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책의 뒷배경에는, 전쟁을 통해 인간의 잔인함과 신의 존재에 있어서의 회의감 그 속에 절망하던 사회 분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책도 곧 구조주의에 의해 관심이 떨어졌다. 구조주의는 세계의 의미를 결정하는것은 인간이 아니라 그저 구성하는 요소들간의 관계일뿐이라는 주장이다.
2부 존재와무의 핵심 사상
이 세계에 존재하는 존재를 의식의 유무를 중심으로 사물존재, 곧 즉자존재와 인간존재, 곧 대자존재로 구분. 의식은 의식 스스로가 파생시키는 무라는 원동력을 통해 자기 밖에 있는 사물존재를 지향하면서 그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의식을 가지고 있는 인간존재, 곧 대자존재는 무를 자기 안에 포함하고 있는 존재이며, 이 무를 토대로 한 무화작용을 통해 현재 있는 그대로의 존재 인 즉자존재와 달리, 현재 있는 것으로 아니 있게 되고 또 현재 아니 있는 것으로 있게 된다고 보고 있다. 인간존재는 다시 나와 타자로 구분된다. 그리고 그 둘을 서로가 서로를 객체로 사로잡으려는 투쟁의 관계로 규정하고 있다.
1)무신론과 존재의 우연성
신의 부재를 자신의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이 가정을 받아들인다면 결국 이 세계의 모든 존재는 반드시 거기에 있을 필연적인 이유가 없이 그냥 거기에 있게 되는 것이다.
# 사르트르는 영화와 음악에 비유했는데, 영화 안에 있는 것들은 모두 필연성인데 반해 영화를 보고 밖으로 나와 접하는 모든 것들은 필연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보았으며, 음악 역시 음악은 그 속에서 자신들의 질서를 이루고 있고 그들의 질서에 따라서 스스로 멈출 것이라고 보았다.
2)의식과 사물 그리고 의식의 지향성
우연성에 의해 지배되는 이 세계의 모든 존재를 크게 두 영역으로 구분하고 있다. 기준은 의식의 유무이다. 의식을 가진 존재는 유일하게 인간뿐이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존재 가령 모든 동물과 모든 식물은 같은 것으로 취급된다.
# 쉽게 생각해보자면 의식이 없는 사물, 동물, 식물을 즉자존재로 보았고 의식이 있는 인간존재를 대자존재로 보았다.
의식은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사물존재와 달리 의식은 그자체로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의식은 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다만 의식은 내무를 가지고 있지 않을 뿐이다. 다시 말해 의식의 내부는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어있다. 의식은 오직 자신의 지향성 구조를 채우는 과정에서 외부에 있는 사물존재를 빌려와 그것에 의지하여 자신의 실재성을 확보해 나가는 그런 존재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사물존재의 존재론적 우위, 곧 의식을 가지고 있는 인간존재에 대한 즉자존재의 존재론적 우위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 의식은 어떤 텅 빈 공이라고 생각해보자. 그 안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게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이 것은 사물존재에게 붙어 자신의 실재성을 확보해 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얼핏보면 사물존재가 (덕에 의식의 실재성이 확보되었으니?) 존재론적으로 우위에 있다 할 수 있다(사물존재들는 의식을 통해서 의미를 부여받으니깐) 하지만 이 의식을 가진 존재는 인간이기에 결국 인간이 더 우위에 있기도 하다. 아무것도 아닌 그냥 거기에 있는 사물이 인간의 의식을 통해 의미부여되듯-
의식은 외부를 향해 스스로를 폭발시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의식은 초월성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존재론적 증명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두가지 존재를 만나게 된다. 하나는 의식 외부에 있는 즉자존재이다. 또 하나의 존재는 자기자신이다. 즉 의식이 자기 자신을 지향하는 것이다. 의식이 자기 자신이 아닌 외부에 있는 다른 대상을 지향하여 그것을 가지고 자신의 지향성 구조를 채우려고 할 때는 이 대상에 대해 정립적이고 조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의식이 이 대상을 자기 앞에다 자신의 목표물로 가져다 세우는 태도를 취한다. 반대로 의식이 자기 자신에 대해 취하는 태도는 비정립적이고 비조정적이다.
#의식이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무엇인가를 채우기 위해 항상 바깥으로 향하는 점에서 지향적이다고 볼 수 있다는 것. 훔.. 의식이 자기 외부를 지향하는 부분은 이해가 갔는데, 자기 자신을 지향하는 부분은 이해가 잘안간다...담배예시. 일단 적어보자면 내가 담배갑에 들어 있는 담배 개수를 세고 있다. 나의 의식은 오로지 담배만을(사물, 즉자) 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지향하고 있다) 하지만 담배 개수를 세고 있는 나를 의식하지 않는다(그 의식이 그 의식 자신을 지향하진 않는다). 하지만 담배 게수를 세고 있는 나의 의식은 분명히 있다. 그렇다면 이 예시에서는 자기 자신의 의식이 있지만 그것을 지향하는 내용은 아닌 것 같은데...어렵네 ㅎ,,
3)무와 무화작용
스스로를 초월하는 의식의 힘은 무와 무화작용에서 온다. 포수-참새. 한시점(t1)에서 어떤 한 대상(o1)을 겨냥해서 이 o1을 자신의 의식의 지향성 구조를 채우기 위한 그 무엇인가로 삼는다 . t1에서 참새가 포함되어 있는 이 세계라고 하는 무차별적인 지평에서 o1만을 잘라내는 것이다. 포수의 의식은 s1이라 칭한다. 포수가 참새를 정조준하는 과정에서 그의 의식 속에서는 t1에서 o1을 겨냥했다가 이 o1이 자기가 원하는 참새가 아니라는 것을 판단하고 t2의 o2를 t3에서 o3 이렇게 계속해서 나간다. 포수의 의식은 t1에서 o1과 지향성을 통해 관계를 맺을 때 이 o1에 대해 거리를 펼치는 현상이 그것이다. 이 거리는 의식이 스스로를 초월하여 외부에 있는 대상을 겨냥하는 가운데 나타난다. 따라서 이 거리는 의식에게만 고유한 것이다.그리고 의식이 외부의 대상을 겨냥하고 또 겨냥된 이 대상으로부터 빠져나올 때 나타나는 이 거리, 이것이 바로 무이다. 그러면서 두가지 무화작용이 존재하는데, 첫번째 무화작용은 의식이 자기자신을 계속해서 초월할 때에 나타난다. 매 시점에서 바로 이 시점 직전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계속 벗어나게 된다. 이 처럼 어떤 한시점에서 의식이 이 시점 바로 직전의 자기 의식을 계속적으로 초월하는 것 이게 바로 의식이 자기자신에 대해 행하는 무화작용이다. 두번째는 의식이 외부에 있는 대상에 대해 행하는 무화작용이다. 계속해서 자신이 정한 참새가 아닐경우 이것을 하나씩 차례로 제거해 나가는 작업을 의식이 외부에 있는 대상에 가하는 무화작용이다. 여기서 원하는 참새가 아니였기에 후회하고, 다시 재조준하고 하는 이런 여러 행위들을 말할 수 있다.
무가 아니면 아무도 존재에 의해서 존재에 도달할 수는 없다. 무는 존재의 고유한 가능성이며 또 존재의 유일한 가능성이다.
#길어졌는데, 단순히 적어보자면 내가 오늘 친구랑 00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래서 카페에 들어갔다. 그리고 카페에 있는 여러 사람들 중에 내 친구를 찾으러 이리저리 쳐다본다. 왼쪽 구석에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내 친구가 아니다. 내 의식이 저기 있는 저사람에게까지 펼쳐진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내친구가 아니였으므로 내 의식은 나를 초월했다가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다. 이 거리가 무이다. 이렇게 의식이 자꾸 내 자신을 벗어나게 된다는 점에서 의식이 나에게 행하는 무화작용 첫번째라 할 수 있고, 이렇게 차례로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내 의식의 지향성 구조를 채우려고 의식들을 하나 둘 출동! 시켰다가 내 친구가 아니구나 깨닫고 다시 제거해나간다 이것을 대상에 가하는 무화작용 첫번째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무화작용은 그 존재를 무시한다..? 라고 이해해도 좋을까요..아무튼 전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4) 즉자존재와 대자존재
만약 이 세계에 즉자존재만 있다면 존재들 사이에는 아무런 관게가 형성되지 않을 것이며, 이존재들 하나하나는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 있게 될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즉자존재는 그 자체로 있다. 즉 즉자존재는 자기를 그자체 안에 담고 있다. 자체동일성으로 존재한다. 반면 대자존재는 늘 자기 자신을 향해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대자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인간존재 또는 그의 의식은 절대로 자기 곧 자기자신을 포착할 수 가 없다. 왜냐하면 이 의식이 자기를 포착하는 순간 자신에 대해 외부 사물과 같은 정립적 태도를 취하게 되고, 또 그렇게 되면 자기 자신을 사물화해서 응고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대자존재가 그 자체로 존재의 결핍이자 결여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의식이 그 자체로 존재가 아니며, 항상 외부에 있는 그 무엇인가를 빌려와 자신의 존재로서의 실재성을 확보한다고 했다. 이처럼 의식은 그 자체로 결여이며, 따라서 대자존재 역시 그자체로 결여 상태로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자기자신에게 있어 결여로 존재하고, 의식은 자기를 계속 초월하면서 외부를 지향하는 작업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엄청 멋진 말이다 호오. 결국 우리 인간의 최종목표는 자기 자신을 일치하여 나라는 존재의 총체성을 확보하는 것으로 보았는데 (이를 즉자 대자의 결합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건 신이 되고자하는 욕망이며 사실 될리 없음 ㅎㅎ..그치만 꼭 그것을 결합하는 것만이 중요한건 아니기도 하단 말이죠 내가 그것을 결합하려는 시도, 꾸준한 노력. 의식의 꾸준한 지향성 초월성. 다시 말하면 우리의 의식은 어디로든 갈 수 있고 그 가능성은 무한대로 열려있으니 얼마나 자유로운가! 이것은 자기자신을 투기한다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또한 이미 바뀌지 않는 과거, 그리고 내가 미래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 하고 구상하는 미래 역시. 즉자의 시간으로 여겨진다. 즉 사물존재로 굳어진다는 것이다. 의식이 사물존재로 굳어지는 것. 그렇기에 대자존재의 시간은 현재일 뿐이라고 말한다.
5) 실존의 불안과 자기기만
인간존재는 세계의 귀추중심으로 선다. 뿐만 아니라 이 인간 존재는 자신의 의식의 지향성 구조를 채우는 과정에서 언제 어느 곳에서나 외부에 있는 사물 존재를 잘라낼 수 있다는 의미에서 자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인간 존재는 계속해서 자신의 의미식의 지향성 구조를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한다. 이 과정에서 불안을 겪게 된다. 미래를 향한 이 투기와 창조, 이 것이 바로 실존이다. 실존이란 말은, 거기에서 벗어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라틴어에서 파생되었다. 실존의 참된 의미는 탈격, 곧 벗어남에 있다. 신으로부터 아무런 본질을 부여받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가만셔 실존을 통해 자신에게 결여된 본질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라는 명제에 담긴 의미이기도 하다 l'exitence précède l'essence
#나는 이걸 읽는 또 한편으로 정말 내가 이 세상의 중심이라는걸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내 세계를 끊임없이 채워나가는 것. 나로 이루어지는 세상. 본질의 백지 그 불안 속에서 우린 계속해서 선택하고 달려나가겠지만 그 것이 도리어 얼마나 자유롭게 하는지도 안다. 뭐든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다. 연필을 물감이라고 할 수 없듯이, 나는 연필과 물감이 아님에 감사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자기기만은 대자가 자유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나마 증명해주는 개념이다. 왜냐하면 자기기만은 의식이 스스로 대자임을 부정하고 또 이부정하는 사실을 알면서 스스로를 즉자, 곧 의식이 없는 사물존재, 곧 즉자존재로 바꾸어보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근엄한 정신이란 인간존재가 자신의 자유, 무 ,가능성 등으로부터가 아니라 이 세계로부터 출발해서 자신을 창조해 나가는 정신이다. 다시말해서 이 세계에 있는 대상들로부터 출발하고 또 이미 즉자화된 가치들, 가령 돈, 명예 권력 등과 같은 가치들로부터 출발해서 자신을 창조해 나가는 정신이다.
#여기서 근엄한 정신은 부정적으로 쓰였고, 자기기만은 자신이 그것을 알면서도 자신 스스로를 속인다는 의미이다. 의식을 가지고 즉자화된 가치들로 자신을 창조해나감으로써 자신 스스로를 속이며 자신을 즉자화시키려한다는 것으로 쓰인 것으로 이해했다. 여기서 그가 어떤 부류를 싫어했을지 눈에 띄게 보이는 부분입니다..
6) 타자와 시선
대타존재의 두 문제 가운데 첫 번째 문제인 타자의 존재에 관한 문제를 다루면서 시선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타자는 나를 바라보는 자라는 정의를 내리고 있다.
나는 점차 세계의 중심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하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런 시각에서 이 세계에 인간, 즉 타자의 출현이라고 하는 것은 나의 세계를 훔쳐가는 하나의 특수한 존재가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제 더이상 이세계의 주인, 곧 귀추중심의 자격을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는 반대로 나는 누군가가 중심이 되어 새로이 조직되는 또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거리를 부여받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하나의 의식으로부터 거리를 부여받는 존재는 사물존재, 곧 즉자존재의 특성. 이처럼 나는 누군가에 의해 바라보여짐으로써 즉자성, 곧 객체의 자격을 부여받게 된다. 인간 대 인간의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아 객체화시키면서 주체의 위치를 차지하려고 하는 갈등과 투쟁으로 귀착되고 만다.
#즉 정리하자면 내 세상으로 살고 있었는데 타자가 출현하게 되고, 이 세상에 타자가 나를 바라본다. 우리는 여태 어떤 것을 바라보면서 의식은 지향하게 되고, 그것을 즉자존재라고 불렀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에 의해 바라보여진 존재인 나역시 응고된다는 것에서 즉자존재가 되었다고 보여질 수 있다. 그렇다면 내 세계는 붕괴되고 타자의 중심에서 새로운 세계가 조성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타자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는 알 수 없기에 그것은 내가 짊어지어야하는 짐으로 규정되고 있다! 이렇게 보면 밖에 나가면서부터 보는 모든 사람들과의 시선 교차. 등등 이 얼마나 보이지 않는 치열한 싸움일까요..?우리는 얼마나 수많이 우리의 세계를 누군가의 세계 속으로 흘러보내며 뇌출혈을 경험했을까요?
7) 신체
타자가 나를 바라볼 때 그의 시선에 들어오는 것은 바로 나의 신체이다. 신체도 의식과 같이 완전히 심적 현상이며 이들은 서로 구별되는 두 개의 실체여서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하나라는 것이다. 의식은 신체의 방식으로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체의 방식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다. 즉 신체는 나의 우연성의 필연성이 취하는 우연적인 형태이다.
내 신체가 타자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과 같이, 타자의 신체도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이것이 신체의 제2차원이다.
나는 신체의 자격으로 타자에 의해 지각되는 대상-신체로 존재한다. 이것이 신체의 제3차원이다. 타자의 시선 속에서 나-신체와 나의 세계는 소외된다. 또한 타자의 시선에 의해 존재하는 대상-신체는 타자의 가능성에 속하기 때문에 나는 그 모습을 알 수가 없다. 내가 그 모습을 알려면 언어에 의존해야만 한다.
#즉 나는 타자의 시선에 의해 지각되고 알 수 없기에 소외되기도 하며 실존을 통해 체험하고 살아가야만 하는 신체를 의미한다. 이를 통해 종합적으로 신체에 대해 이야기하자면,타자는 먼저 나에게 나의 대상-신체를 준다는 의미에서 내가 물리쳐야 할 적이다. 또한 타자는 대상 신체를 통해 나에게 외부로서의 본성을 준다는 의미에서는 필수불가결한 존재이기도 하다.
8) 시선 투쟁과 갈등
시선은 인간에게만 고유하다는 사실을 지적하자. 사물존재, 곧 즉자존재는 시선을 가질 수가 없다. 의식을 가진 인간존재, 곧 대자존재만 시선을 가지고 있다. 사르트르는 인간의 얼굴을 고귀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까닭은 인간의 얼굴은 시선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시선은 이 시선의 주체, 곧 인간존재가 갖는 의식의 흐름과 동의어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선은 존재론적 힘으로 여겨진다. 또한 시선이 갖는 이 힘은 모든 것을 객체화시킬 수 있는 힘이다. 결국 타자는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면서 상대방을 객체로 사로잡으려는 시선의 투쟁을 벌일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나와 타자의 근본적 관계는 갈등으로 귀착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사르트르의 타자 관계에 대해 읽고 있으면 타자는 그야말로 내 세상을 침범하는 적군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그의 철학이 정말로 내 생각들과 꼭 걸맞다고 느낀다.
9) 타자와의 구체적 관계들
타자는 나의 지옥이다. 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다. l'enfer, c'est les autres. 하지만 타자란 나의 존재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서의 지위가 있다. 무엇이건 나에 관하여 어떠한 진실을 얻으려면 타자를 통과해야만 한다. 타자는 나 자신을 연결해 주는 필수불가결한 매개자로 규정되고 있기도 하다.
#타자에게 바라보여짐으로 객체화된다는 점에 있어서 지옥이기도 하지만, 방라보여짐으로써 이 존재가 나의 존재근거에 해당되기도 하기 때문... 타자와의 관계 속에 나타나는 마조히즘. 이것은 나의 자유와 초월을 버어던쳐 타자의 자유와 초월의 객체로 전락시키는 관계. 이 타자의 자유 속에서 도리어 휴식을 맛본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 즉자화시킨 대가로 누리는 휴식이기에 씁쓸한 휴식이라 한다. 사디즘에 있어서는 타자를 객체화시키기 위한 노력이기 때문에 나는 타자의 자유와 초월을 벗어던지게 만들고 육체속에서 사로잡음으로써 사디스트가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은 타자의 자유이다. 하지만 이 역시 결국 타자가 자기 자유를 포기하는 것은 자기 선택이기에 완전한 승리라 할 수 없다. 무관심도 있다. 그건 타자를 아예 무관심으로 일관하여 타자의 시선에 의해 절대 객체화되지 않고 물건처럼 가볍게 스친다. 하지만 이것도 실패하는 이유는 타자에 의해서 바라보여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무관속에 느끼는 편안함을 압도하기 때문... 증오가 가장 특별하게 여겨진다 하네.. 하지만 증오로 타자를 사라지게 한들, 타자의 시선 속에 있었다는 사실은 사라지는게 아니므로 영원히 응고됨.
아마도 전에 이야기들로 설명될 수 없었던 부분들을 타자를 출현함으로써 더 방대하게 설명해주는 듯 한다. 마조히즘 사디즘, 사랑 욕망 이런 감정들은 타인과 엮지 않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니까,,
10) 실존의 세 범주 : 함, 가짐 , 있음 faire avoir être
인간존재의 투기는 함, 가짐 있음 이 세가지 범주로 환원된다. 인간존재가 자신을 창조해 나가기 위해 하는 모든 행동의 1조건은 자유이다. 인간존재는 매 순간 자기 자신을 선택한다 그리고 이 선택은 의식이 자기 자신의 지향성 구조를 채우기 위해 외부 세계에서 무엇인가를 선택하는 것과 같다. 또한 모든 투기는 상황 속에서 행해진다. 상황은 인간 존재가 자신의 행동의 목적이라는 불빛으로 자기 외부에 주어진 여러 요소들을 밝힐 때에라야만 비로소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나에 의해 창조된 대상은 이중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 첫 째, 대상은 바로 그것을 창조한 자와 동일하다. 대상이 나 자신 곧 나의 분신이 된다. 그 까닭은 내가 대상을 창조하면서 나의 모든 것, 가령 나의 주체성, 나의 자유, 나의 의식 나의 사상, 나의 표지, 곧 나의 혼 등을 이 대상 안에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둘 째, 내가 창조한 대상은 나와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창조된 대상은 즉자존재와 같은 사물로서 창조자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어떤 대상을 소유하고자 한다면 그걸 자신과 동일시하기 위함이다.
내가 창조한 대상을 이 세계에 오게끔 했다는 의미에서 이것의 출현을 보증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창조해낸 대상을 내가 소유할 때 나는 나의 존재근거를 갖게 된다. 왜냐하면 나에 의해 존재이유가 부여된, 그러니까 나에 의해 창조된 이 대상을 내가 직접 소유하기 때문이다. 즉 대자-즉자 결합 상태를 실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반하는 내용으로 내가 만든 즉자존재는 혼자서 절대로 확보될 수 없다 내가 만든 분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자와 대자의 실현으로 보면 즉자-대자 결합은 실패라고 볼 수 있다고 한다. 근데 대자는 어떻게 보면 의식이 있는 것을 뜻하는데, 아무리 내가 창조한것에 내가 혼을 다 넣었다 해도 그게 의식이 있다 할 수 있나요? 그 의식이 자유로이 존재해 무언가를 계속 지향해나가고 투기해나간다고 볼 수 있나요? 그런 의미에서 대자로 보는 것이 조금 이해 안가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파괴는 역방향으로 이루어지는 창조라는 것이다. 보통의 경우 창조는 이 세계에 무엇인가를 존재하게끔 하나, 이에 반해 파괴는 이 세계에 이미 존재하는 것을 없대는 창조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함의 범주가 그렇듯이 이 파괴 행위 역시 가짐의 범주에로 환원된다는 것.
준다는 것은 자기가 주는 대상물을 소유적으로 향수하는 일이며, 그것은 야유화적 파괴적인 하나의 접촉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증여는 증여를 받는 상대방을 흘려 놓고 만다. 주다는 일은 굴복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준다는 일은 그와 같은 파괴를 이용해서 타인을 자기에게 굴복시키는 일이며 그 파괴에 의해서 자기 것을 만드는 일이다.
#준다는 증여 행위를 통해 타자가 이를 받는다면 나에 의해 객체화되고 자유를 빼앗아 굴종시키는 것이라 본다. 그런 의미에서 베풀고 주는 것을 부정적으로 쓰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보통 우리 사회에서는 이것을 도덕적으로 불리운다. 그럼 그들이 말하는 도덕적인 관용과의 차이는 무엇일까. 일단 익명으로 관용의 협약이 이루어지고 관용의 실철이 이루어진다면 이를 도덕이라 부를 수 있다.
끝!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아마 소장하고 싶어서 한국가면 책 살듯. 그리고 난 역시 저 시대에 살아서 구조주의가 인기를 끌었더래도 사르트르의 철학관을 훨씬 더 좋아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몇십년이 지난 지금도 이렇게 공감하고 이해하고 있으니깐요.. 자존감 낮은 나에겐 더 없이 좋은 자기계발서 같기도 했습니다. 이 세상은 나로부터 구성되고, 모든 것은 나의 의식으로 의미가 이루어지고요. 물론 여기서 등장하는 타자로부터 내 자유가.. 나는 여기서 자존감이란 말로 대체했습니다. 자존감을 뺏기기도 하지만요, 끊임없는 투쟁 속에 그들은 내 존재의 필수불가결하기도 합니다. 나는 결핍되있기에 도리어 자유롭다. 우리는 계속해서 어떤 지점을 향해 나아가지만 결코 거기에 완전히 도달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 지향해야 한다. 거기서 오는 불안은 당연한거다! 그러니까 정말 큰 위로를 얻은 셈입니다. 다음은 구토를 꼭 읽겠어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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