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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적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졌나보네요 펜을 든지 오랜만에 이렇게 계속 써내려가고 있는 것을 보면! 두 번째로 사르트르 책을 읽고 있습니다. 여전히 어렵긴 하지만. 그의 책의 소개 중 '존재와 무'에 대해 니체 이후 신이 사라져버린 시대에 인간에게 바치는 찬가이자 비가라고 칭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마치 그의 글이 이 세상 모든 인류를 위한 듯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자고 마음 먹지만 그 방향이 어디인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 또한 압니다. 적어도 내가 파고 있는 이 땅 속에서 무엇을 캐고자 하는지는, 스스로 알아야하니까요. 나는 깊이 질투하고 시기하고 열등감 덩어리임을 자각합니다. 이는 표피마냥 떼어지지 않고 꼭 들러 붙어 나를 괴롭힙니다. 그것을 내 것이라 부르지 않고 다른 개체라고 일컫겠습니다. 언젠가 떼어버리고 말 깊은 사명감을 안고 말입니다. 지하철을 타기 전에 노란선의 경계에 선 채 그 앞으로 나아갈 수도 좀처럼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던 애매함. 불분명한 상태로 모호하고 엉거주춤 서있던 건 내 일생을 보여줬는지도 모르겠지요(물론 지하철의 노란선 앞으로 가는건 자살 행위니 하지 마시오) 미술관에 갔는데 자주 풀리는 신발끈을 모른 체하고 걸으니 뒤에 있던 직원분이 내 신발끈을 가르키셨습니다. 감사한 마음에 얼른 신발끈을 묶었지만, 부끄러운 마음에 대충 묶고 그 자리를 나가버린 그 이유 탓에 또 내동댕이 신세를 면치 못 할거에요. 그 애매한 걸음들이 연거푸 이어지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두렵기도, 창피하기도, 들켜 버릴 땐 이 못난 분노가 일기도 합니다. 제대로 지어진 매듭 없이 닳고 닳아 어중간히도 살아갑니다. 인간에게 바치는 찬가 라고 적은 그를 향한 찬가. 이런것들이 한켠에, 고파서- 허기지고-말라 비틀어지는 형태가 될-된-되었던 이 모든 것에 해당되는 게 제 3자의 시선으로 안타깝다고 말할 수 있는 때가 온다면 조금 더 가벼워졌음을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던져지며 지닌 것이 많아 일 평생동안 부단히도 행동하고 생각하고 쉴 틈 없이 살아갈지도 모릅니다. 떼어내고 버려내며 자유로운 몸으로 새롭게 쌓아올릴 순간을 고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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