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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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날의 갈증쓰다 2016. 9. 13. 03:23
한창 쨍한 여름이 지나고 서서히 가을로 가던 그즈음에 나는 어린아이 마냥 사랑이 고팠으며, 자꾸만 표출했다. 나를 사랑해달라고. 그것의 방법은 떼를 쓰기도 했고 관심 종자같기도 했다. 더 많은 시선을 갈구하고 목마른채 퍼지지 않는 우물을 찾아나섰으며 썩은 물만이 입안에 남았던, 텁텁하던 그 여름. 두 손에서 피가 나는줄도 모르고 내 밧줄들을 모조리 잡았다. 모두 포기할 수 없는 나의 것. 그 끝에 남는 건 가짜일지라도 이 허황된 끈을 끄끝내 놓지 못한 채 어깨를 짓눌렀다. 언젠가는 응답이 올거라는 기대 속에. 나는 내 원 안에서 사랑받길 처절히도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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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밤을 사랑한다쓰다 2016. 8. 30. 03:01
나는 밤을 사랑한다정확히는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그 시간을 사랑한다. 그리고 나는 그 시간을 잘 알지 못한다날이 어두워지면 까만 커튼이 내 주위를 둘러싸는 기분이다어둠은 오직 나만을 홀로 남겨둔 채 모든 감정들을 넘겨준다까만 커튼 아래 외로이 쓸쓸히 눕는 나맴맴하는 매미들의 울음소리는 밤의 소리가 되고, 창문을 여니 들어오는 밤바람은 따스한 구석이 있다모두가 잠든 시간 작은 향에 의지한 채 하루동안 머릿 속 불투명히 자리잡은 단어들을 되새긴다완전해진 문장 아래로 조용히 파도가 일렁인다 비춰지는 모습은 홀로 앉아 글을 적은 소녀의 가녀린 등. 어둠은 그녀의 등을 더욱 따스히 감싸온다밤은 그런 시간.밤은 내 모든 감정들을 이해받을 수 있는 시간나는 그런 밤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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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세계를 건설하는 일쓰다 2016. 8. 26. 01:42
책에 한 때 미쳤던 때가 있었다. 1학년 겨울 펑펑놀기만 하던 나에게로 날아온 성적표 그리고 그걸 바라보시던 어머니. 실망한 어머니의 모습과 함께 책이라도 읽으라던 말씀 한마디. 무엇이라도 해야겠다며 집었던 책들이 한권이 되고 두권이 되고. 불끄며 잠이 든 어머니 옆에서 핸드폰 불빛으로 몰래몰래 페이지를 넘겼던 그날들. 지식의 습득 따위를 바란게 아녔다. 재밌어서 읽었고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게새벽을 지새웠으며 다시 일어난 아침엔 새 책을 집어들었다. 내 기억 속 그 해 겨울은 여름이 되기도 했고 15살의 중학생이 되기도 했으며 일본의 어느 작은 집에 있기도 했다. 어딘가로 어디든 갈 수 있었고 누구든 될 수 있었던 것, 책은 이렇듯 나에게 놀라운 경험을 안겨주었다. 책과 잠시 떨어져 있는 동안, 나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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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보게 한다는 것쓰다 2016. 7. 26. 03:00
오늘 밤 내가 들어간 욕실 안에서 몇번 적신 물로 벗겨지지 않는가? 지겨워졌다 반짝이는 파도는 낮에 햇살아래 부셔지고 밤에 더욱이 깊어진다 낮에도 밤에도 존재하고 싶은 이. 깊은 바다가 되고 싶어서 나는 크레파스를 벗겨내고 지워내고 씻겨냈다 그리고 검은 활자를 삼켜냈다 생각의 늪에 머리를 담구었고 보이지 않은 세상에 눈을 깜빡였다 눈과 귀를 털어 열리지 않은 상자에 담아낸다 열리지 않은 상자는 열리지 않을 것이다 이 부푸는 상자를 보라 뿜어져나오는 머리의 온기를 느껴라 이내 빨려들어가는 혀끝의 지식을 음미해라 하지만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다 온기와 내음, 만지지 않으면 모를 이야기들 혀로 둘둘 말아서 어깨죽지까지 감싸야한다 그리고 내 곁으로 머물게 해야한다바라보는 눈동자는 고정된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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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을 죽이는 개성쓰다 2016. 7. 26. 01:38
24색 크레파스를 한박스 꺼낸다 흰색과 검은색 회색을 치우고 남은 크레파스를 훑어본다 그 중 눈에 띄는 빨간색 분홍색 파랑색을 집어든다 그리고 팔다리에 한번 쇄골을 따라 두어번 척추를 타고 다시 한번 칠한다 거울을 들여다보니 팔꿈치에 살색이 삐죽삐죽하다 못마땅한 나는 금색 크레파스를 들어 한번 칠한다 그래도 보이는 살색은 짓이겨도 살아나는 개미떼들 같아서 벅벅 칠해댔다 죽어라 죽어라. 다시금 보는 거울 속 내 모습은 그 안에 내 팔꿈치엔 피가 나있음에도 반짝이는 금색이 아름다워 나는 만족스럽게 웃어댔다 눈물이 나도록 웃어댔다 그렇게 신명나게 웃어대니 보이는 내 누르스름한 이들 샛노랗지도 새하얗지도 않은 것들 애매하게 섞어 애매한 색으로 이루어진 애매한 것들 마지막으로 노랑색 크레파스를 들어 빈틈없이 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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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쓰다 2016. 7. 24. 03:06
내 얼굴이 한뼘크기만하게 존재한다. 이마 눈썹 귀 귓볼 목선 광대 윗입술 두번째 어금니 목울대 둥그런 모형 안에 존재하는 내 것들 내 것이라고 여겨진 것들은 이내 버리고 싶어버릴만큼 혐오스럽기도 하다 스티커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남의 것을 데려오지 않는다 결국 하나의 유기체로서 손을 잡고 우린 하나가 되어버렸다 그렇다 실은 되어버린 것이라고 하는 편이 옳다 어쩔 수 없이 굴복해버린 것이다 굴복당한 존재들은 떠나지 못해 운다 상상의 세계에 역시 나는 존재한다. 사실 상상의 세계는 나 그 자체이다 그래서 나는 한뼘보다는 클지도 작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한뼘은 아니란 소리다 그 세계에는 내 목울대가 등허리에 달라붙었다 내 한두개의 어금니들은 금으로 되어 금은방에 갇힌지 오래다 도톰한 입술은 도마위..